모형회사 "카이요도" 이야기
안녕하세요,
카이요도 제품 보고 문득 이전 TV 방송이 있어 찾아보니 뭐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찾을 수가 없어 일단 일본 위키백과와 전에 본 TV 프로내용를 조합하여 보았습니다.
피규어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카이요도제품 잘 아시겠지만 이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답니다.
미야와키 오사무(宮脇修)는 오사카, 모리구치시 역 앞에서 운영하던 책방을 1964년 4월 개장, 한평 반 정도는 모형(플라모델)의 상점을 운영 시작하였다. 가게 근처 아이들에게 항상 인기였다.
단지 모형을 파는 것 만이 아니라 근처의 집회소를 빌려 모형 교실이나 전시회를 열었다
슬롯 레이싱(모형 회사 타미야 등) 이 유행, 문 닫은 공장을 빌려 큰 코스의 경기장을 만들어 밤늦게까지 청년들이 몰려 수익은 최상이었다.
여러 가지 실패
큰 플라모델 회사 이마이 과학 이 경영위기에 빠젔을때 사장 스스로 미야와키 오사무에게 상담을 요청해와 "카이요도", 이마이 과학이 발매하고 있던 TV 시리즈 선더버드는 돌출 판매 실적이 있었다. 미야와키는 로마의 군선 플라모델을 제안하고 판매에 있어 노하우를 가르쳐주었다. 충실하게 상품화된 로마 군선은 히트 상품이었다. 그러나 가이요도와 이마이과학은 싸우고 헤어지고 만다. 결국 한 푼의 아이디어료도 받지 못하고 노하우만 빼앗긴 셈이 된다.
위에 말한 슬롯레이싱장은 볼링장이 개장된다 하여 옆에 200평 창고(나중에는 가이요도의 호비관이된다.)를 새로 빌려 180m에 이르는 장대한 레이싱 코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동일 레이싱장들이 새로 생겨 손님들은 떠났다. 그리고 180m의 레이싱코스는 너무 컸다. 15센티 안되는 레이싱카는 멀리 달려가버리면 시아에서 안 보이게 되어 감으로 조작해야 했다. 특히 하교나 PTA는 슬롯레이싱은 불량 놀이, 비행의 원흉이라 비난 받기 시작하여 슬롯레이싱 자체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레이싱장 임대료도 높고, 자금 융통은 점차 악화되어 빚으로 빚을 갚는 것의 반복이 되어 버렸다. 더한 일은 오사므가 돈 빌리러 돌아다닐 때 부인은 병으로 쓰러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게 된다. 오사무는 다시 돈을 빌리러 돌아다녔다.
아케이드게임
슬롯레이싱이 완전히 수그러 지던 때 다시 미야와키오사무는 엉뚱한 발상을 한다. "이 창고를 온 세상의 모형을 모으는 호비관으로 하자. 일본 제일 큰 모형점으로 하겠다" 라고 200평의 면적을 모형으로 메우는 것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고, 가게에 늘여 놓을 상품은 별로 늘지 않았다. 매출의 대부분은 재고 매입에 사용해서 변함없이 빛 지옥이었다. 그런 카이요도를 구한 것은 모형이 아니라 게임이었다.
겔럭시안등 아케이드 게임을 가게에 들여놓은 것이 게임 목적으로 아이들이 많이 오게 되었다. 안고 있던 많은 빚은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했다.
미야와키의 아들이자 당시 이미 가게의 대부분을 맡았던 미야와키슈우이치(현제 카이요우도 대표이사)도 당시 빚을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카이요우도는 모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어져 가고 있었다. 이때 모형을 사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며 매일 찾는 청년이 있었다. 그들은 훗날 유명한 조형사(프로모덜러)가 된다. (보메 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미소녀 모형의 최고 권위자. 그밖에 분야의 모델러들리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단순한 단골 손님 들이 였다. 미야와키는 청년들과 가게에서 식사도 대접하기도 하고, 그들도 심부를 을 무상으로 해주기도 하였다. 미애와키부자는 그들과 이상한 인연으로 "카이요도"는 높은 기술을 가진 조형사(모델러)들이 모이는 주춧돌이 되었다.
<오카도토시오프로에서는 위의 이야기. 뭐 하도 들어 귀가 앞을정도...
하지만 분명 세월이 흐르면 일본 문화로서 역사가 되겠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오카다토시오가 모형사업이 잘되었다면 가이낙스도 에반게리온 같은 애니메이션도 없이 그냥 모형회사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80년대 초, 애니메이션, 특촬 팬들에게 공존의 열기를 보였다. 잡지 "우주선" (2005년 일시 휴간한 뒤 2008년 출판사를 바꾸어 재간)의 불씨가 되면서 업체가 상품화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만들자. 메이커 물건은 본래 캐릭터와 전혀 닮지 않아 자신이라면 더 잘 만들 수 있어 마니아들 사이에서 제조업체의 모형을 사서 그냥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다들 잘 만들어 내고 만족했지만, 미야와키부자(아버지와자식^^;)나 "카이요도"에 모이는 모델러 들은 어떻게든 이것을 복제하는 기술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바큠폼키트 라는 간단한 성형 복제 기술로 만든 모형은 존재하고 마니아 사이에서도 알려져 있지만 조립에 상당한 기량을 요구하고 원형 재현도도 낮았다.
어느 날 당골 모델러인 커와구치테츠야가 모스라 유충 키트를 가지고 "카이요도"에 왔다. 그의 본직은 치과 기공사인 틀니나 인레이(의학용어로 이에 봉박는 합금)를 만드는 기술을 응용한 방법으로 자작 모슬러 애벌레를 복제한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다들 놀랐다. 이 방법을 쓰면 플라모델 생산에 사용되는 금형 사출 성형보다 큰 폭으로 저렴하며 초기 투자로 치밀하고 리얼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여러 시행착오와 각자의 모델러들과의 정보 교환끝에 "실리콘 고무로 본을 뜨고, 그것에 발포 폴리우레탄을 붓고 복제하다"라는 방법이 확립되어 저 언제부터인가 "가레지키트"라고 불리게 된다.
이후 "카이요도"는 자신들이 갖고 싶다, 만들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만들어서 가게의 회원들에게 판매하게 되었다.
그런 "카이요도"에 당시 카레지키트를 제작, 판매하고 있던 "제너럴프로덕츠"(후의 가이낙스) 대표, 오카다토시오가 나타난다. 장사의 라이벌이 가게에 찾아와 자신의 지론을 말하는 오카다... 경쟁심이 강한 미야와키부자와 "카이요도"의 모델러는 대항적이었다. 이것은 제너럴프로덕츠와 라이벌 관계의 시작이었다.
제너럴프로덕츠는 "판권을 취하고 제품을 팔 것" 으로 시작했다. 패키지 디자인도 열중하여 제품 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제너럴프로덕츠는 제대로 된 상품 비즈니스로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는 "카이요도"의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요도"는 복잡한 절차를 밟아 판권을 사서 물건을 만들어 판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가레지키트에 시민권을 부여하여 더 많이 판매하는데 불가결하다고 인식하게 되어 "카이요도"에서도 판권을 취한 뒤에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사용자들 사이에서도 제너럴프로덕츠 보다 "카이요도"가 제품의 질(=원형의 성적)이 좋다고 평가하여 이후에 제너럴프로덕츠는 가레지키트 사업을 철수하고 애니메이션, 게임소프트 제작사로 전향한다. 가레지키트 승부에서는 이겼다고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92년 가레지키트 최대 축제인 "원더 페스티벌"의 주최를 제너럴프로덕츠에서 승계 받아 업계의 주도적 역할을 짊어지고 가게 되었다,
바큠폼키트
슬롯레이싱
카이요도는 사원이 손가락으로 셀정도 밖에 안되지만 그사람들은 각각 한 분야에 이름을 떨치는 모델러들로 과거 당골로 찿던 손님들이 었지요. 미소녀, SF물, 곤충, 동물, 괴수 등 각분야로 유명한 사람들이 이회사를 아끌어 가고 실제 유럽 박물관에서도 모형제작 의뢰가 온다고 합니다. 헐리우드 영화인 쥬라기 공원의 공룡은카이요도의 공룡모델을 컴퓨터그레픽 제작의 자료로 사용 했다고 할정도 입니다.
그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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